“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면 날개를 펼친다.” 사건에 개입하기 보다는 관망하고 사유하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이는 말이지만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오늘 그 역할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녕 이 대학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가? 아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대항할 수 없었던 우리의 나약함이다. 동료가 당하는 부당함을 목격하고도 외면할 수밖에 없을 때, 내가 당한 억울함에 분노하다가도 나중에 받을 학위를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진정시킬 때 우린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다. 대학의 황혼은 이미 저물었다. 실천의 날개를 펼칠 때이다.
그 동안 대학에선 소신껏 지식을 생산하게 만드는 연구노동자들의 학문의 자유 보다는 자신의 학벌과 권위를 지키기 위한 자율성을더 추구했다. 그 결과 비판은 사라진 채 권위에 따라 이해관계가 움직이는 봉건제가 되어버렸다. 이미 연구실은 하나의 회사 같고, 대학본부와 재단은 프로젝트를 따온 교수들에게 세금을 받고 영지를 떼어주는 영주가 되었다. 각종 부조리와 연구부정은 이런 구조의 부산물이다.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혹은 모범적인 작은 사회로서 존재가치를 스스로 포기했다. 각종 비리백화점이 되어버린 대학, 성원들을 착취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대학, 학벌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버린 대학에서는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약자 위에 군림하는 시범을 보인다.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로 재정이 어려워졌다면서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들을 먼저 해고하는 대학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언론 지면을 들썩거리게 한 대학의 인권/노동권 침해 뉴스를 보라. 대학들은 소위 고급인력을 양성한다는 허울을 쓴 채, 수많은 대학원생들을 착취하고 있다. 스승이라는 미명하에 학생들을 괴롭히는 교수만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불거지면 꼬리만 자를 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대학과 구조적 개혁 없이 방관해 온 정부, 이를 단지 ‘개인’과 ‘관행’의 문제로만 국 한시켜 책임을 회피해온 이들 모두가 공범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있다. 우리는 이 모순의 피해자거나 생생한 목격자이거나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심지어 일부 대학원생은 적극적인 공범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우리가 침묵한 채 시간이 흐르면 과연 나아질 수 있는가? 저 공범들에게 자정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대학원내의 부조리가 터져 나왔고 우리 대학원생들은 한국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대학원생들의 싸움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흩어진 개인의 참다못한 폭로를 넘어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싸울 것이다. 그리고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지켜준다면 대학원은 반드시 바뀔 수 있다. 우리가 대학원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없으면 대학 운영이 어렵다. 우리가 없으면 학회가 운영되지 못한다. 우리가 없으면 대학의 연구프로젝트가 수행될 수 없다. ‘학생이 무슨 노동자냐’는 구시대의 편견을 무색하게 만드는 우리는 이미 지식생산의 공장인 대학의 필수불가결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더는 견딜 수 없는 썩은 대학가의 관행을 직접 척결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 받아야한다’는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대학의 한 주체인 대학원생들은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우리는 토론과 비판이 살아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대학, 구성원들의 권리가 고르게 인정될 수 있는 대학을 요구한다. 사회가 함께 누릴 공공재인 지식의 생산에 연구노동자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대학이 자본의 탐욕과 봉건적 구조를 벗어던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교육공공성과 연구공공성을 확립한 진정한 공공기관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그 이름으로 그동안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대학원생들이 모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혼자 흐느끼지 않고 함성을 지를 것이다.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대신, 대학본부를 향해 힘차게 행진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모일 것이고 더 큰 걸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