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이 ‘또’ 죽었다
연구노동자들의 신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졸렬한 한국 사회
지난 8월 11일 아파트건축 현장 6층 높이에서 창호 작업을 하던 20대 박사과정생 故 강보경 노동자는 작업 첫날 추락해 사망했다. 대학원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디엘이엔씨(구 대림건설)에서 건설 하청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그였다. 불과 며칠 전인 10월 13일에는 서울대학교의 한 20대 대학원생이 “공부가 힘들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학내 도서관의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열람실이나 연구실을 출퇴근하며 온종일 앉아 책과 자료를 상대하는 대학원생, 생업을 위해 건설현장에 출근하는 대학원생,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삶의 궤적을 그리지 못해 집 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대학원생. 대학원생들은 ‘미완’과 ‘결함’의 존재로 취급받으며 매 순간 자기 존재 증명을 요청받는다. 각자가 갈고 닦는 현재와 가슴에 품은 미래는 사회가 요구하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데도 말이다. 불안정한 법적·사회적 지위에서 앎을 생산하는 대학원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이해는 여전히 처참한 수준이다.
“공부가 힘들다”는 그 한 마디가 어떤 의미인지 듣지 못하는 이 사회는 ‘공부하는 사람들’을 이중적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학원생의 오랜 “공부”는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안에 전문적 지식이 생산·유통·축적되는 과정의 대우는 없다시피 하다. ‘그만두면 되지 않냐’는 손쉬운 반응은 대학이 이미 교육의 장을 넘어 하나의 사업장으로 기능하며 또한 대학원생의 생활 공간이자 엄연한 일터라는 사실에 대한 몰이해다. 나아가 전혀 자명하지 않은 자본의 논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에 종속되어 즉각적인 반향을 낳지 못하는 “공부”는 비루하다고 간주하는 비틀린 인식이다. 대학원생의 “공부”에 대한 왜곡상은 실적에 대한 과도한 압박과 동료 간의 상호 감시 체제로 이어진다.
허울뿐인 ‘이념’과 ‘카르텔’에 잠식된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구성된 시장 속에서 모두가 자유로운 순수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마치 하위 20% 과제의 구조조정을 R&D 효율화처럼 보이게 하듯 말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물가인상률과 이에 대비되어 역대 두 번째로 낮게 인상된 최저시급의 현황 속에서 높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동시에 진로를 탐색하며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대학원생은 패배에 대한 공포와 초조에 자연히 젖게 된다. 국가는 ‘학생’이라는 호명으로 대학원생이 산업재해나 하청노동과 연루되는 순간을 외면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는 대학원생 연구노동자를 ‘자격’을 필요로 하는 신체로 만들고 기업 논리에 따른 이윤 창출을 위한 투자 대상으로 간주한다. 모든 위기 상황을 대학원생들에게 의탁한 채 말이다. 그 결과는 대학원생의 죽음, 죽음, 죽음이다.
졸렬한 국가와 사회는 마치 대학원생들에게 대의와 사명감으로 “공부”하라고 권하는 듯하기까지 하다.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자세는 학자의 주된 덕목이겠으나, 동시대 연구노동자의 정체성은 지사(志士)를 초과한다.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침묵할 생각 마라. 또한, 우리가 한마디 말과 글로 침묵하리라 생각지 마라. 연구노동자들의 죽음을 똑똑히 직시하라.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전국대학원생 노동조합